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단 편집) === 5월 29일 - 최후의 공세 === || [[파일:external/cgimg.s3.amazonaws.com/1233571_large.jpg|width=100%]] || || 5월 29일. 1,000여년 동안 제국의 심장을 지켜주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드디어 무너지다.[* Jose Daniel Cabrera Peña라는 사람이 CGsociery에 올린 그림이다. 무장 방면에서 고증이 훌륭하다.] || 29일 자정, 1차 공격대로 오스만군 측 [[기독교]] 병사들이 선봉으로 성벽을 향해 돌격했고, 그 뒤를 이어 비정규 [[아나톨리아]] 지역 [[튀르크]] [[궁수]]들인 아잡(Azap)의 공격이 뒤를 이었다. 블라혜르네(Blachernae) 방면은 11세기에 지어진 곳으로 가장 약하다고 판명되었고, 이미 일전의 포격으로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다. 1차 공격대는 이 구역의 벽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으나, 수비군이 빠르게 재배치되어 적들을 몰아내었다. 여명이 밝아져 올 때까지 격전이 이어졌고 아잡으로 대표되는 비정규군과 기독교 군대의 전투는 성과가 없었다. 이에 오스만군 측 정규군인 아나톨리아 군단으로 구성된 2차 공격대의 공격이 이어졌다. 도시의 북서쪽 방면에 집중된 이 파상공세에 동로마 병사들은 결사항전하며 이들을 막아냈지만, 자정부터 이어진 공격에 지쳐가고 있었다. 오스만 정규군은 앞서온 1차 공격대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싸움을 이어갔고, 방어군은 파상 공세에 점차 힘이 딸려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에 오스만군은 제3차 공격대로 준비되어있던 [[예니체리]] 부대를 전부 투입한다. 이미 날은 밝아오고 있었고, 전투는 계속 되었지만, 방어군은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전투로 피로에 찌든 방어군에게 쉬지 않고 계속해 몰아붙이는 오스만군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적이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046059405069e299590c6e4bfb08c81.jpg]] 설상가상으로 이 처절한 공방 와중에 수비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복부에 심한 중상을 입게 된다. 그가 부상당해 후송되자, 그의 직속 부대인 제노바 군대도 뒤로 물러난다. 그의 지휘 아래 지옥 같은 공성전을 버텨내던 방어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제노바 군대가 철수한 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그의 근위대와 함께 싸움을 이어간다. 그러던 와중 시민들의 출입구로 이용되던 '''비밀 쪽문 케르카포르타(Kerkaporta)가 열리는 일이 발생한다.''' || [[파일:attachment/e0063976_4ab4f2005f4d3.jpg|width=100%]] || || 성벽에 오스만의 [[군기]]가 오르다. || 성벽 안으로 진입할 절호의 기회를 노리던 예니체리 군단은 이 문으로 돌진한다. 아비규환 속에 이 문은 제대로 닫히지 못하고, 오스만군은 이 문을 통과해 방어탑을 점령하고, '''성문엔 오스만 군기가 세워진다.'''[* 이것도 성벽을 완전히 점령해서 세운 게 아니고, 50여 명의 예니체리가 들어와 방어탑을 점령했다가 동로마 군에게 추격당하며 여기저기로 흩어졌는데, 예니체리 중 한명이 혼자 성벽 위에 세워 버린 것이다.] 1000년 동안 단 한 번밖에 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던 철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어이없게도 방어군의 실수로 인해 적의 침입을 허용한 것이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먼저 마지막 전투에서 콘스탄티노스는 배수진을 친다는 생각으로 내성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걸어 잠그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교전 중에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치명상을 입어 후송되었는데(당연히 콘스탄티노스에게서 열쇠를 받아서), 황제 다음으로 육군을 총지휘하던 인물이 후송되자 수비군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는 것.] 이미 성벽의 다른 지역도 압도적인 병력에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고, 마침내 깃발까지 올라가자, 방어군은 패닉에 빠지게 된다. 한편 그와 같은 때, 남쪽의 성벽에서도 울루바틀르 하산(Ulubatlı Hasan)이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오스만의 깃발을 꽂았다. 그는 그 직후 전사하였으나 오스만의 깃발이 꽂힌 것을 본 수비군은 패배를 직감했고, 오스만군은 동료의 시신을 넘어 성벽 전체를 제압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들은 황제가 있는 메소티히온 성벽으로 몰려가, 메소티히온 수비군은 앞과 옆에서 동시에 공격받는 형태가 된다. 베네치아 측 사료에서는 주스티니아니의 후송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이어졌다고 되어 있으나, 오늘날 학자들 가운데에는 수비군이 협공을 받은 때야말로 도시의 함락이 결정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이 전공으로 인해, 울루바틀르 하산은 평범한 [[시파히]] 병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튀르키예]]의 민족 영웅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그 정도 급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 때문에 아래의 '평가와 의의' 문단에 언급되는 [[튀르키예 영화]] <정복자(Fatih) 1453>에서는 메흐메트 2세의 최측근이자 무술 스승으로까지 그려지는데, 생전의 그가 누렸던 지위에 비하면 [[주인공 버프]]를 받아도 제대로 받은 것. ~~사실 주인공은 메흐메트지만, 그런 거 [[알 게 뭐야]]~~] 동로마 병사들은 성벽을 포기하고 그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고,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의 배를 찾아 항구로 모여든다. 나머지 병사들은 항복하거나, 성벽 아래로 투신하는 것으로 각자의 공방전을 마감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그의 자주색 망토를 집어던진 후, 다가오는 오스만군에게 단신으로 돌격하여, 거리에서 싸우는 그의 병사들과 삶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콘스탄티노스 11세]] 항목에 소개되어 있지만, 그가 전사하지 않았다는 사료도 있다. 공식적으로 황제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스만 측 사료에는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죽었다고 되어 있고, [[서유럽]] 측 사료에는 오스만군이 성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목을 맸다고도 되어 있다. 또 공방전에 직접 참가했던 [[피렌체 공화국|피렌체]]의 상인 자코포 테달디는 '누구는 그가 자결했다고 하고 또 누구는 참수당했다고도 하는데, 아마 자결한 다음에 목이 잘린 거 아닐까' 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나 모두 야사에 불과하다.] [[로마 제국|2,200여년을 이어온 제국]]과 운명을 같이 한 그의 최후에 관해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 무엇도 그의 최후를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도시로 진입한 오스만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메흐메트 2세는 그가 [[기독교]] 지역을 총괄할 관리를 임명하는 상징적 장소로 거룩한 사도 성당을 원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근위대]]를 보내 [[약탈]]을 막도록 명령했다. 메흐메트가 중요 건물로 지정한 건물 외의 나머지 지역은 모두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몇몇 운 좋은 시민들은 탈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인들이 탈출하려 시도했을 때는 이미 금각만 쪽 성벽이 점령당한 시점이었지만, 병사들은 약탈에만 관심이 있었지 살육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은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지휘관들은 금각만 쪽 문을 부수고 나왔고, 난민들과 병사들을 싣고 금각만에 정박한 배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 흐름에 황제의 휘하에 있던 배들도 항구를 빠져나갔다. 오후쯤에 오스만 해군이 금각만을 통제했을 즈음에는 이미 거의 모든 배가 빠져나가 있었다. 도시 내부에 있는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하였다. 병사들은 그 앞 광장에 모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시민들은 병사들과 하기아 소피아의 청동 문이 그들을 보호해 주리라 믿었지만, 청동문은 결국 오스만군의 손에 열리게 된다. 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리게 된다. 치열한 싸움으로 인한 오스만군의 사상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총공세까지의 전투 상황[* 3차(마지막) 공격대이자 오스만 최정예부대인 [[예니체리]]까지 투입했다. 이 말은 1차와 2차 공격대가 성벽을 돌파하지 못했다는 뜻. 적든 많든, 성벽 돌파에 지장이 가는 피해였을 것이다.]으로 보아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으리라 보고 있다. 도시가 함락된 후 오스만군의 약탈에 대해 베네치아 [[의사]] 니콜로 바르바로는 이렇게 전한다. > (도시에 흐르는 피가) 마치 갑작스런 소나기 후의 도랑 속 물길 같았다. [[튀르크인]]과 기독교인들의 시체는 바다 위에 마치 운하 속 과일들처럼 떠다녔다.[* 도시가 함락된 후에도 오스만군이 한동안 학살을 계속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오스만군은 수비군이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두 달 동안 우리 대군을 쩔쩔매게 한 적군이 아직 남아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건 누구건 눈에 보이는 [[로마인|동로마인]]이나 서유럽인은 무조건 학살하고 다녔던 것이지만, 이윽고 상황을 파악하자 학살보다는 노예로 잡아 파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렇게 2206년 역사의 [[로마 제국|로마]]는 한 [[메흐메트 2세|혈기왕성한 젋은 술탄]]에 멸망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